그레이트브리튼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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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은 1707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으로 형성된 국가이다. 1474년에 처음 사용된 "그레이트브리튼"은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아 브리튼과 브르타뉴를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으며, 1707년 연합 조약을 통해 공식 명칭이 되었다. 앤 여왕 시기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졌고, 이후 하노버 왕가로 왕위가 계승되었다. 영국은 7년 전쟁에서 승리하며 세계적인 제국으로 성장했고, 북아메리카 식민지 상실 이후 아시아, 태평양, 아프리카로 관심을 돌려 제2 제국을 건설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아일랜드와 통합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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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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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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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정식 명칭 |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
국가 표어 | 신과 나의 권리 |
국가 | 하느님, 국왕을 지켜주소서 (1745년부터) |
수도 | 런던 |
공용어 | 영어 법률 프랑스어 |
지역 언어 | 스코트어 웨일스어 스코틀랜드 게일어 노른어 콘월어 |
국민 | 영국인 |
종교 | 개신교 잉글랜드 국교회 스코틀랜드 교회 |
통화 | 파운드 스털링 |
정치 | |
정치 체제 | 단일 의회제 입헌군주제 |
군주 | 군주 |
초대 군주 | 앤 (1707년 ~ 1714년) |
군주 2 | 조지 1세 (1714년 ~ 1727년) |
군주 3 | 조지 2세 (1727년 ~ 1760년) |
군주 4 | 조지 3세 (1760년 ~ 1800년) |
총리 | 총리 |
초대 총리 | 로버트 월폴 (1721년 ~ 1742년) |
마지막 총리 | 윌리엄 피트 (1783년 ~ 1800년) |
의회 | 그레이트브리튼 의회 |
상원 | 귀족원 |
하원 | 평민원 |
역사 | |
이전 국가 |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
건국 이전 사건 | 연합 조약 |
건국 이전 날짜 | 1706년 7월 22일 |
건국 사건 | 연합법 |
건국일 | 1707년 5월 1일 |
해체 사건 | 아일랜드와의 통합 |
해체일 | 1800년 12월 31일 |
시대 | 근세 |
인구 | |
1707년 인구 | 7,000,000명 |
1801년 인구 | 10,500,000명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영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
기타 | |
ISO 3166 코드 | 생략 |
2. 명칭
"브리튼(Britain)"이라는 이름은 그레이트브리튼 섬에 대한 라틴어 이름인 "브리타니아(Britannia)"에서 유래했다. 이는 고대 프랑스어 "브르타뉴(Bretaigne)"와 중세 영어 "브레타인(Bretayne)", "브레테인(Breteyne)"을 거쳐 전해져 내려왔다.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이라는 용어는 1474년에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7]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잉글랜드는 16세기에 웨일스를 병합)은 1707년까지 별개의 국가였다. 1603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잉글랜드 국왕이 되면서 두 왕국은 동군연합을 이루었다. 스튜어트 왕조 하의 왕관의 연합은 그레이트브리튼 섬 전체가 단일 군주에 의해 통치됨을 의미했고, 이 군주는 잉글랜드 왕관을 소유함으로써 아일랜드 왕국도 통치했다. 각 왕국은 자체 의회와 법률을 유지했으며, 맨섬과 채널 제도를 포함한 여러 작은 섬들도 국왕의 영토에 속했다.
"그레이트(Great)"라는 단어가 "브리튼(Britain)" 앞에 붙은 것은 프랑스어의 영향 때문이다. 프랑스어는 브리튼과 브르타뉴를 모두 "브르타뉴(Bretagne)"라고 칭했기 때문에, 두 지역을 구별하기 위해 브리튼을 "라 그랑드 브르타뉴(la Grande Bretagne)"라고 불렀고, 이 명칭이 영어로 번역되었다.[8]
연합 조약에서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그레이트브리튼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왕국으로 통합될 것"이라고 명시했다.[9]
3. 정치 구조
1707년 연합 조약이 발효되면서 단일 통합된 그레이트브리튼 왕관과 단일 통합된 의회가 생겨났다.[16] 입법권은 영국 의회에 위임되었는데, 이는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를 대체했다.[17] 영국 의회는 하원, 상원, 그리고 왕실의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되었다. 잉글랜드 귀족의 상원 의석권은 유지되었고, 스코틀랜드 귀족은 각 의회에서 선출된 16명의 스코틀랜드 대표 귀족만을 보낼 수 있었다. 잉글랜드 하원의원들은 영국 하원의원으로 계속 활동했고, 스코틀랜드 대표는 45명으로 고정되었다. 그레이트브리튼 귀족에서 새로 만들어진 귀족과 그 후손들은 상원에 참석할 권리가 있었다.
스코틀랜드는 별도의 의회가 없어졌지만, 자체 법률과 사법 시스템, 장로교회와 학교에 대한 통제권은 유지했다. 사회 구조는 계층적이었고, 1707년 이후에도 동일한 지배 계급이 통제력을 유지했다. 스코틀랜드는 자체 대학을 유지했고, 특히 에든버러의 지식인 사회와 함께 스코틀랜드 계몽 운동은 영국, 미국 및 유럽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18]
아일랜드 왕국은 1694년 이후 잉글랜드의 실효 지배하에 있었으나, 통합되지는 않았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아일랜드에서도 혁명 정부와의 연계가 있었고, 1798년 아일랜드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재발 방지를 위해 윌리엄 피트 수상이 1800년 연합법을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왕국은 1801년 아일랜드 왕국과 통합하여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성립하였다.
3. 1.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의회의 통합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정치적 통합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스튜어트 왕조 군주이자 그레이트브리튼의 첫 번째 군주였던 앤 여왕의 핵심 정책이었다. 1706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의회 대표자들 간의 협상 끝에 연합 조약이 합의되었고, 각 의회는 이를 비준하기 위해 별도의 연합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1707년 5월 1일에 발효되어 잉글랜드 의회와 스코틀랜드 의회를 통합하고 두 왕국을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으로 통합했다.[19] 앤 여왕은 통합된 영국 왕위에 오른 첫 번째 군주가 되었고, 연합 조약 22조에 따라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각각 새로운 그레이트브리튼 하원에 의원을 파견했다.[19]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지배 계급은 권력을 유지했고, 각국은 법률 및 교육 시스템뿐만 아니라 기존의 교회를 유지했다. 통합된 두 국가는 더 큰 경제를 형성했고, 스코틀랜드인들은 새로운 영국군과 제국에 병사와 식민지 관리들을 제공하기 시작했다.[20] 그러나 초기의 주목할 만한 차이점 중 하나는 새로 선출된 스코틀랜드 의원과 대표 귀족들이 스코틀랜드 의회에서 선출된 반면, 웨스트민스터의 하원과 상원의 모든 현직 의원들은 계속해서 직무를 수행했다는 점이다.
3. 2. 아일랜드의 역할
포이닝스 법률에 따라 아일랜드 의회는 잉글랜드 의회에 종속되었고, 1707년 이후에는 그레이트브리튼 의회에 종속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의회의 1719년 선언법(아일랜드의 그레이트브리튼에 대한 의존성 법률 1719년으로도 불림)은 아일랜드 왕국이 그레이트브리튼 왕관에 종속되고 의존되기 때문에, 국왕은 그레이트브리튼 의회를 통해 "아일랜드 왕국과 국민을 구속할 충분한 효력이 있는 법률과 법령을 제정할 완전한 권한과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 법은 1782년 아일랜드 의존성 확보 법률 폐지법에 의해 폐지되었다.[1] 같은 해, 1782년 아일랜드 헌법은 입법적 자유의 시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영국 왕관에 대한 국가의 종속과 의존을 종식시키고 공화국을 수립하려고 했던 1798년 아일랜드 반란은 1801년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 왕국의 형성으로 이어진 요인 중 하나였다.[2]
4. 역사
1603년, 스튜어트 왕조의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의 왕을 겸하면서 두 나라는 동군연합 관계를 맺었다. 1707년 연합법으로 양국 의회가 통합되어 하나의 국가가 되었지만, 1999년 스코틀랜드 자치 확대 정책으로 스코틀랜드 의회가 부활했다.
아일랜드 왕국은 1694년 이후 잉글랜드의 실효 지배를 받았으나 이때는 통합되지 않았다. 채널 제도와 맨섬도 왕국에 통합되지 않았다.
1776년 미국 독립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고,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아일랜드에서도 혁명 정부와 연계하여 1798년 아일랜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윌리엄 피트 수상이 1800년 연합법을 제정하여 1801년 아일랜드 왕국과 통합,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 왕국이 성립되었다.
4. 1. 앤 여왕 시대 (1702–1714)
앤 (재위: 1702년 - 1714년)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스튜어트 왕조 군주이자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첫 번째 군주였다. 앤 여왕의 주요 정책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통합이었다.[21]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1702~1714) 동안 잉글랜드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에 맞서 네덜란드 공화국, 신성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고 자금을 지원했다.[21] 앤 여왕은 존 처칠 1세 (말버러 공작)을 비롯한 고문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전쟁을 이끌었다. 이 전쟁은 잉글랜드에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었지만, 1710년 반전 성향의 토리당이 의회를 장악하면서 강화가 추진되었다.
유트레히트 조약(1713)은 영국에 매우 유리하게 체결되었다.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뉴펀들랜드와 아카디아를, 스페인으로부터 지브롤터와 미노르카를 얻었다. 특히 지브롤터는 영국이 대서양과 지중해를 잇는 해상 통로를 장악하는 데 중요한 해군 기지가 되었다.[22]
이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의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 지배력은 약화되었고, 영국은 세계 무대에서 주요 제국, 군사 및 재정 강국으로 부상했다.[22] 영국의 역사가 G. M. 트레블리언은 유트레히트 조약이 18세기 문명의 안정적인 시대를 열었으며, 프랑스 왕정의 위협이 종식되고 영국의 해상, 상업, 재정적 우위가 확립되었음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23]
4. 2. 하노버 왕가 계승 (1714–1760)
1707년 연합 이후, 영국은 프랑스를 주요 경쟁자로 하여 세계 최고의 식민 지배 국가로 부상했다.[24] 1714년 앤 여왕이 사망하면서 하노버 왕가의 조지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역사가 W. A. 스펙은 1714년 지배 계급이 심하게 분열되어 앤 여왕의 죽음으로 내전이 발발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많았다고 썼다. 당시 망명 중이었던 스튜어트 왕가의 "구 왕위 계승자"의 정통성에 헌신한 토리당과 하노버 왕가를 강력하게 지지하여 프로테스탄트 계승을 보장하려 했던 휘그당으로 분열되었다. 조지 1세는 외국 왕자였으며, 그의 고향 하노버와 네덜란드 동맹국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그를 지지하는 소규모 영국 상비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1715년 자코바이트 봉기에서 마르 백작은 새로운 국왕을 전복하고 스튜어트 왕가를 복위시키는 것을 목표로 18명의 자코바이트 귀족과 1만 명의 병력을 이끌었으나, 조직이 부실했던 이 봉기는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여러 지도자들이 처형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토지를 몰수당했으며, 약 700명의 저명한 추종자들이 서인도 제도의 사탕 수수 농장에서 강제 노역에 처해졌다.[25] 왕위 계승자가 로마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종교를 바꾸기를 거부한 것은 토리당의 더 많은 부분을 동원했을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결정이었다. 제임스 스탠홉, 찰스 타운젠드, 선덜랜드 백작, 그리고 로버트 월폴의 지도 아래 휘그당이 권력을 잡았다. 많은 토리당원들이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에서 쫓겨났고, 더 큰 국가 통제를 부과하기 위한 새로운 법률이 통과되었다. 신체 보호령의 권리가 제한되었고, 선거 불안정을 줄이기 위해 1715년 7년 의회법은 의회의 최대 수명을 3년에서 7년으로 늘렸다.[25]
4. 2. 1. 조지 1세 시대 (1714–1727)
조지 1세는 재위 기간 동안 하노버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으며, 1716년, 1719년, 1720년, 1723년, 1725년에 장기간 하노버를 방문하여 재위 기간의 상당 부분을 해외에서 보냈다.[26] 이러한 방문은 중요한 협상과 정보 및 의견 교환의 장이 되기도 했다.[26] 그러나 하노버 방문은 비평가들에게 영국의 이익이 소홀히 되고 있다는 주장을 제기할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26] 조지 1세는 영어를 할 수 없었고, 그의 영국 장관들로부터 온 모든 관련 문서는 그를 위해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26] 소수의 영국 장관이나 외교관만이 독일어를 알거나 정확한 논의에서 그것을 다룰 수 있었다.[26]조지 1세는 토리당의 실각을 지지했으며, 토리당은 그의 증손자인 조지 3세가 1760년 집권하여 휘그당을 토리당으로 대체하기 시작할 때까지 정계에서 멀어져 있었다.[27] 조지 1세는 역사책에서 종종 풍자적으로 묘사되었지만, 그의 전기 작가인 라그닐드 해튼(Ragnhild Hatton)에 따르면 그는 대영제국에 이익이 되는 일을 했으며, 전후의 어려운 시기와 반복적인 침략 또는 침략 위협을 침착하고 책임감 있게 이끌었다.[27] 그는 효율성과 전문성을 좋아했고, 질서 있는 국가를 운영한 오랜 경험이 있었으며, 그의 장관과 육군, 해군 장교들의 자질과 빠른 배를 가진 해군의 강점을 신경 썼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해군의 강력함은 더욱 커졌다.[27] 그는 유럽에서 영국의 힘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정치적 비전과 능력을 보여주었다.[27]
4. 2. 2. 월폴 시대 (1721–1742)

로버트 월폴(1676–1745)은 지주 계급 출신으로 1721년부터 1742년까지 하원에서 권력을 장악했으며, 1727년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총리"라는 직책을 맡은 최초의 인물이다.[30] 그는 정치적 동맹들에게 고위직, 종신 연금, 훈장, 수익성 있는 정부 계약, 선거 지원 등을 제공하여 의회를 장악했다.[30] 1742년에는 140명이 넘는 의원들이 월폴 덕분에 고위직을 차지했는데, 왕실 법정 24명, 정부 기관 50명, 그리고 나머지는 무보수직이나 연봉 500GBP~1000GBP에 달하는 보수를 받는 자리였다.[30] 1725년, 월폴은 새로운 기사 작위인 대영 제국의 훈장(Order of the Bath)을 제정하여, 36명의 수훈자 대부분을 자신에게 유용한 귀족과 의원들로 채웠다.[31]
월폴의 방식은 계속된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격렬한 반대도 불러일으켰다. 야당인 컨트리당은 월폴의 후원(patronage)을 부패로 규정하며 끊임없이 공격했다.[34] 코브험 경은 1733년 이후 자신의 인맥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조직했다. 윌리엄 피트와 조지 그랜빌(George Grenville)은 코브험의 파벌("코브험의 새끼 사자들")에 합류하여 월폴의 주요 적이 되었고, 훗날 모두 수상이 되었다.[35]
1741년, 월폴은 외교 정책 비판과 부패 혐의에 직면했다. 그는 영국을 스페인과의 무의미한 전쟁에 끌어들였다는 비난을 받았다.[36] 1741년 2월 13일, 전 동맹이었던 새뮤얼 샌디스는 월폴의 퇴출을 요구했다.[36] 월폴의 동맹은 209대 106으로 불신임 결의안을 물리쳤지만, 1741년 선거에서 의석을 잃었고, 결국 1742년 초 근소한 차이로 실각했다.[38]
4. 3. 조지 3세 시대 (1760–1820)
조지 3세는 1760년부터 1820년까지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을 통치했다. 그의 통치 기간은 다음과 같은 여러 중요한 사건들로 특징지어진다.- 7년 전쟁 (1756-1763): 영국은 장로 윌리엄 피트의 주도로 1763년 파리 조약을 통해 프랑스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얻어 세계적인 식민지 제국으로 부상했다.[44][45]
- 복음주의 운동: 18세기 후반,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운동은 노예 해방, 동물 학대 금지 등 사회 개혁을 추구했다.[46][48]
- 미국 독립 전쟁 (1775-1783): 중상주의 정책 하에 성장한 제1영국 제국은 13개 식민지의 상실로 큰 타격을 입었다. 영국은 북아메리카의 주요 식민지를 잃었지만, 애덤 스미스의 자유무역 이론에 따라 새로운 제2영국 제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다.[53]
- 오스트레일리아 식민지 건설: 영국은 제임스 쿡의 탐험(1770년)을 통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고, 1788년 시드니에 유형지를 건설하여 새로운 식민지로 삼았다.[58][60]
- 인도에서의 세력 확장: 영국 동인도 회사는 로버트 클라이브의 활약으로 벵골을 장악하고 인도 대부분 지역을 통제하게 되었다.[61]

-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의 등장은 영국에 큰 위협이 되었다. 영국은 영국 해군을 통해 프랑스를 봉쇄하고, 1798년 아일랜드 반란을 진압한 후 1800년 연합법을 통해 아일랜드를 통합했다.[64][67]
4. 3. 1. 7년 전쟁 (1756–1763)
7년 전쟁은 1756년에 시작된 최초의 세계 규모 전쟁이었으며, 영국은 유럽, 인도, 북아메리카, 카리브해, 필리핀, 그리고 아프리카 해안에서 프랑스와 싸웠다. 장로 윌리엄 피트가 주요 결정을 대부분 내렸다. 전쟁 초기 영국은 1756년 미노르카 섬을 잃었고, 북아메리카에서 잇따라 패배했다. 그러나 1759년 "기적의 해"("Annus Mirabilis")에 영국의 운세가 바뀌었다. 영국은 프랑스의 침공을 걱정했지만, 그 해 말에는 모든 전선에서 승리했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티콘데로가 요새(카리용)를 점령했고, 오하이오 지역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냈으며, 결정적인 아브라함 평원 전투에서 캐나다의 퀘벡 시를 점령했고, 서인도 제도에서는 풍부한 사탕수수 섬 과들루프를 점령했다. 인도에서는 존 회사가 마드라스를 포위한 프랑스군을 격퇴했다.유럽에서는 영국군이 민덴 전투에서 연합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라구스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고 결정적인 퀴베롱 만 해전에서 승리하여 프랑스의 침공 위협을 끝냈고, 영국은 세계 최고의 해군 강국으로서의 명성을 굳혔다.[44] 1763년 파리 조약은 제1영국 제국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뉴 프랑스(퀘벡)가 영국의 통치하에 들어가면서 프랑스의 북아메리카에서의 미래는 끝났다. 인도에서는 제3차 카르나틱 전쟁에서 프랑스가 여전히 몇몇 작은 점유지를 통제했지만, 군사적 제약과 영국의 보호국을 지원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인도의 미래는 사실상 영국에게 넘어갔다. 7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한 영국은 세계 최고의 식민지 지배국이 되었고, 프랑스는 복수를 갈망하게 되었다.[45]
4. 3. 2. 복음주의 운동과 사회 개혁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잉글랜드 교회 안팎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힘을 얻었다. 이 운동은 존 웨슬리(1703~1791)와 그의 추종자들을 중심으로, 성경 읽기, 정기적인 기도, 개인적인 신앙 경험을 강조하며 부흥주의적 종교를 설파했다. 웨슬리는 5만 2천 번이나 설교하며 사람들에게 영혼 구원을 촉구했다. 웨슬리는 잉글랜드 교회 내에서 활동했지만, 그가 죽은 후 감리교회가 설립되었다.[46] 이는 장로교, 회중교회, 침례교, 유니테리언 교회, 퀘이커 교회와 같은 비국교도 교회들과 함께 존재했지만, 비국교도 교회들은 부흥주의의 영향을 덜 받았다.[47]잉글랜드 교회는 여전히 지배적이었지만, "저교회파" 내에 복음주의적 부흥주의 세력이 성장했다. 윌리엄 윌버포스와 하나 무어 등이 그 지도자였다. 이들은 클랩험파를 통해 상류층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노예 해방, 결투 금지, 아동 및 동물 학대 금지, 도박 금지 등 사회 개혁을 추구했다. 복음주의자들은 매일 성경을 읽으며, 모든 영혼은 평등하지만 모든 신체가 평등한 것은 아니라고 믿었기에, 영국 사회의 계층적 구조에 도전하지는 않았다.[48]
4. 3. 3. 제1영국 제국
제1대 영국 제국은 주로 북아메리카 본토와 서인도 제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영국령 인도에서도 영향력이 증대되고 있었다. 영국에서의 이주는 주로 13개 식민지와 서인도 제도로 이루어졌으며, 뉴펀들랜드와 노바스코샤로 향하는 이주도 일부 있었다. 영국령 인도로 영구 정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돈을 벌고 고향으로 돌아갈 희망을 가지고 그곳으로 갔다.[49]중상주의는 영국이 해외 식민지에 부과한 기본 정책이었다.[50] 중상주의는 정부와 상인이 다른 제국을 배제하고 정치적 권력과 사적 부를 증대시키는 것을 목표로 협력하는 것을 의미했다. 정부는 무역 장벽, 규제 및 국내 산업에 대한 보조금을 통해 상인들을 보호하고 다른 상인들의 진출을 막아 왕국으로부터의 수출을 극대화하고 수입을 최소화했다. 정부는 밀수와 싸워야 했는데, 18세기에 미국인들이 프랑스, 스페인 또는 네덜란드와의 무역 제한을 우회하기 위해 즐겨 사용한 수단이 되었다. 중상주의의 목표는 무역 흑자를 달성하여 금과 은이 런던으로 유입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관세와 세금을 통해 자체적인 몫을 가져갔고, 나머지는 런던과 다른 영국 항구의 상인들에게 돌아갔다. 정부는 상당한 수입을 뛰어난 왕립 해군에 사용했는데, 이는 영국 식민지를 보호할 뿐만 아니라 다른 제국의 식민지를 위협하고 때로는 빼앗기도 했다. 따라서 왕립 해군은 1664년 뉴암스테르담(후에 뉴욕시)를 점령했다. 식민지들은 영국 산업의 종속 시장이었고, 목표는 모국을 부유하게 만드는 것이었다.[51]
4. 3. 4. 13개 미국 식민지의 상실
1760년대와 1770년대에 걸쳐, 13개 식민지와의 관계는 영국 의회가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1763) 중 미국 식민지 주민들을 보호하는 데 발생한 손실을 회복하기 위해 식민지 주민들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하려고 고집했기 때문에 악화되었다.[52] 1775년 렉싱턴-콩코드 전투에서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고, 미국인들은 보스턴 포위전에서 영국군을 포위하고 왕실 지지자들을 진압했다.1776년 7월 4일, 13개 식민지를 대표하는 제2차 대륙 회의는 만장일치로 독립 선언을 채택했다. 제2차 대륙 회의는 5인 위원회에게 선언문 작성을 맡겼지만, 위원회는 초안을 작성한 토마스 제퍼슨에게 의존했다.
대륙군 사령관 조지 워싱턴의 군사적 지도력과 프랑스, 네덜란드 공화국,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아 미국은 영국군의 침략을 막아냈다. 미국은 1777년과 1781년에 영국군 주력 부대 두 개를 포획했다. 조지 3세는 의회의 통제력을 잃었고 전쟁을 계속할 수 없게 되었으며, 1783년 파리 조약의 체결로 전쟁은 끝났다. 이 조약은 13개 식민지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하고 미국을 승인했다.
1775년부터 1783년까지 지속된 미국 독립 전쟁은 비용이 많이 들었지만 영국은 성공적으로 자금을 조달했다. 전쟁 중 약 8,500명의 영국군이 전사했다.[52]
4. 3. 5. 제2영국 제국
13개 식민지의 상실은 영국이 미주에서 아시아, 태평양, 그리고 나중에는 아프리카로 관심을 돌리면서 "제1" 제국과 "제2" 제국 사이의 전환을 의미했다.[53] 애덤 스미스는 1776년에 출판된 『국부론』에서 식민지가 불필요하며, 자유무역이 중상주의 정책을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81년 이후 새롭게 독립한 미국과 영국 사이의 무역 성장은 경제적 성공에 정치적 통제가 필요하지 않다는 스미스의 견해를 확인시켜 주었다.일련의 "프랑스-인디언 전쟁" 이후, 영국은 1763년 프랑스의 북미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다. 누벨프랑스는 퀘벡이 되었다. 1774년 퀘벡법에 따라 퀘벡 주는 미국 식민지의 서부 영토를 포함하도록 확장되었다. 미국 독립 전쟁에서 할리팩스는 영국의 주요 해군 기지가 되었다. 영국은 1776년 미국의 독립혁명 세력의 침략을 격퇴했지만, 1777년 뉴욕에서 영국의 침략군이 포로로 잡히면서 프랑스가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다.[54]
미국의 승리 후, 4만 명에서 6만 명 사이의 패배한 충성파가 이주했고, 일부는 노예를 데려왔다.[55] 대부분의 가족은 손실을 보상하기 위해 무상으로 토지를 받았다. 수천 명의 흑인 자유민들도 도착했지만, 그 대부분은 나중에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으로 갔다.[56] 당시 노바스코샤의 일부였던 세인트 존과 세인트 크로이 강 유역으로 이주한 1만 4천 명의 충성파들은 현지인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그래서 1784년 영국은 뉴브런즈윅을 별도의 식민지로 분리했다. 1791년 헌법법은 프랑스어 사용 지역과 영어 사용 지역 사회 간의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상부 캐나다(주로 영어 사용 지역)와 하부 캐나다(주로 프랑스어 사용 지역)를 창설했고, 대영제국에서 사용하는 것과 유사한 정부 시스템을 도입하여 제국 권력을 강화하고 미국 독립혁명으로 이어졌다고 여겨지는 대중의 정부 통제를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57]
1770년, 영국 탐험가 제임스 쿡은 남태평양 탐험 중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해안을 발견했다. 1778년, 쿡의 탐험에 참여했던 식물학자 조셉 뱅크스는 영국 정부에 보타니 베이가 유형지 건설에 적합하다는 증거를 제출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제2의 영국 제국의 시작을 알리는 곳으로, 런던 정부에 의해 계획되었으며 상실된 미국의 식민지들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58] 1783년, 미국의 로열리스트 제임스 마트라는 "뉴사우스웨일스에 정착지를 건설하기 위한 제안"이라는 글에서 미국의 로열리스트, 중국인, 남태평양 섬 주민들(하지만 유죄판결자는 아님)로 구성된 식민지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59] 마트라는 그 땅이 설탕, 목화, 담배 농장에 적합하고, 뉴질랜드의 목재와 삼베 또는 아마가 귀중한 상품이 될 수 있으며, 태평양 무역의 기지가 될 수 있고, 쫓겨난 미국의 로열리스트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무장관 시드니 경의 제안에 따라 마트라는 이 계획에 유죄판결자들을 정착민으로 포함하는 것을 수정하여 "공공의 경제와 개인의 인도주의" 모두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고려했다. 영국 정부는 1784년 마트라 계획의 기본을 채택하고 유죄판결자들의 정착을 지원했다.[60] 1787년, 퍼스트 플릿이 첫 번째 유죄판결자들을 식민지로 수송하기 위해 출항하여 1788년 1월에 도착했다.
인도는 영국 정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않았다. 대신 영국 동인도 회사라는 사적 이윤 추구 기업이 자체 군대를 거느리고 인도의 일부 지역을 장악했다. "존 컴퍼니"라고 불린 이 회사는 인도의 절반을 직접 통치하고 나머지 지역(수많은 현지 통치자들이 지배)과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18세기 동안 몰락해가는 무굴 제국의 쇠퇴와 1740년대와 1750년대 카르나틱 전쟁 동안 프랑스 동인도 회사와의 경쟁 속에서 동인도 회사의 이권은 영토 지배로 확장되었다. 로버트 클라이브가 플라시 전투와 벅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동인도 회사는 벵골을 장악하고 인도에서 주요 군사 및 정치 세력이 되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동인도 회사는 직접 또는 현지 통치자들과 협력하여 지배하는 영토를 점차 확장했다. 영국 자체는 소규모 상비군만 보유했지만, 동인도 회사는 프레지던시 군대라는 크고 잘 훈련된 군대를 보유했고, 영국 장교들이 인도 원주민 병사(세포이라고 불림)들을 지휘했다.[61]
4. 3. 6.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1793년 루이 16세의 처형으로, 프랑스 혁명은 보수적인 왕당파인 영국과 급진적인 공화파인 프랑스 사이의 이념 대결을 의미하게 되었다.[62] 1793년부터 1815년까지 이어진 프랑스와의 길고 격렬한 전쟁에서 반가톨릭주의는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으로 등장했다. 상류층에서 하류층에 이르기까지, 영국의 프로테스탄트들은 프랑스의 모든 것에 대해 깊은 불신과 혐오감을 공유하게 되었다.[63]1799년 집권한 나폴레옹은 영국 자체 침략을 위협했고, 그와 함께 그의 군대가 이미 유린한 유럽 대륙 국가들과 비슷한 운명을 가져올 것을 예고했다. 따라서 나폴레옹 전쟁은 영국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자금과 에너지를 투입한 전쟁이었다. 프랑스 항구들은 영국 해군에 의해 봉쇄되었다.[64]
프랑스 혁명은 아일랜드에서 종교적, 정치적 불만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1798년, 프로테스탄트 지도자의 지휘 아래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은 프랑스가 영국을 전복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고 믿고 1798년 아일랜드 반란을 계획했다.[65] 봉기는 매우 조직이 부실했고, 훨씬 더 강력한 영국군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었다. 많은 유혈 참사를 포함하여 사망자 수는 1만 명에서 3만 명에 달했다.[66]
수상 젊은 윌리엄 피트는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 영국과 아일랜드의 연합이라고 확신했다. 연합은 1800년 연합법에 의해 수립되었으며, 아일랜드 의회의 지지를 확보했다. 영국과 아일랜드는 1801년 1월 1일에 공식적으로 통합되었다. 아일랜드 의회는 폐쇄되었다.[67]
5. 역대 군주
- 앤 (1707년~1714년) - 1702년부터 1707년까지 잉글랜드 여왕, 스코틀랜드 여왕, 아일랜드 여왕이었다.
- 조지 1세 (1714년~1727년)
- 조지 2세 (1727년~1760년)
- 조지 3세 (1760년~1801년)
앤 여왕은 스튜어트 왕가 출신이었고 조지 국왕들은 하노버 왕가 출신이었다.
6. 심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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